38선(38th parallel) 유래


‘38선’은 해방 직후 한 삼팔선 마을의 흙길 바닥에 쓰인 것처럼 ‘임시 경계선’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1일 일제 항복 직전 미국이 설정하고, 이후 소련이 받아들여 설정된 이 분할통치선은 47년 남과 북이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 지금껏 민족을 갈라놓는 비극의 선이 됐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 이후, 빠른 남진에 당황한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딘 러스크 (
David Dean Rusk)는 당시 미국 국무부에서 근무하는 대령이었다. 러스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우리는 38선을 3성조정위원회(국무·육군·해군의 3성 조정위원회, 스윙크 SWNCC)에 제안했는데, 위원회는 
그 안을 채택했고, 소련도 즉각 그 안을 수락했습니다."



원래 38선은 한반도의 일본 무장해제를 위해서, 두 점령군인 미군과 소련군이 잠정적으로 작전범위를 나눈 선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0일, 미국 국무부의 딘 러스크 대령과 국방부 작전국의 찰스 본스틸 (Charles Bonesteel) 대령이 한반도에서의 미국 점령지 확정을 위해서 논의했다.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완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던 러스크와 본스틸은 38선을 결정하기 위해서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있는 지도를 이용했다. 그들이 북위 38도선을 선택한 것은 한반도를 거의 절반으로 나누고 있고, 특히 수도 서울이 미국 점령지역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한국 전문가와의 상의도 없었다. 두 사람은 20세기초에 일본과 러시아가 38선을 기준으로 조선 분할을 논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 러스크는 만약 당시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았다면, 다른 선을 제안했을 것이라 말했다.

이렇게 졸속으로 그어진 선임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이 연합국간의 전후 일본 점령지의 무장해제 담당 구역을 지정한 연합국 총사령부의 일반명령 제1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딘 러스크는 회고록에서 38선 선택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전후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데, 국무부와 국방부는 미군이 언제 어디서 그들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가능한 북쪽인 만주의 주요 지점을 포함한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는 당시 미군이 거의 혹은 전혀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지역을 책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 국방부는 중국 본토에 가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방법, 즉 한반도에 일종의 발판을 두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자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45년 8월 10일의 회의에서,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한반도 지도를 열심히 연구했다. 긴박한 상황이라는 압력하에서, 우리는 미국의 점령지역을 고르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본스틸과 나는 모두 한국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수도 서울은 미국 진영에 있어야 할것만 같았다. 우리는 또한 미국 국방부가 미국의 점령지가 방대해지는 것에 반대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이 편리한 분계선이 될 것이라 추정했지만, 자연적인 지리학적 경계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38선을 생각해냈고, 이를 3성조정위원회에 추천했다.

위원회는 이 제안을 별 논쟁없이 수용했는데, 놀라운 점은 소련측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소련이 양국의 군사적 상황을 고려해, 더 남쪽의 경계선을 주장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우리 2명의 대령을 포함해서, 위원회의 누구도 20세기초에 러시아와 일본이 38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자고 협상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 역사적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다른 분계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38선을 기준으로, 과거 일본과의 한반도 분할을 모색했던 러시아는 우리의 38선 제안을 한국 38선 이북에서의 소련의 세력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이 역사에 대해 무지했고, 결국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지친 2명의 대령이 제안한 38선을 3성조정위원회가 선택한 것은 숙명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It is known to Koreans that the 38th parallel was created by Americans. After the Soviet Union declared war against Japan on August 7, 1945, the advancement of Soviet troops was so fast that they were likely to take over the entire Korean Peninsula by the end of August.

Dean Rusk and John Bonsteel during their Pentagon night duties asked Soviet authorities to stop at the 38th parallel. Dean Rusk later said his decision was based on the location of the capital city of Seoul. Yes, Joseph Stalin agreed to stop, and pulled out Soviet troops already in the south of the 38th parallel.

The question is why Joseph Stalin had to "obey" the order from these two mid-level officials in the U.S. government, without questioning their credentials.


In 1945, John Bonsteel was a colonel of the U.S. Army, and Dean Rusk was also a mid-level official at the State Department. Bonsteel later served as the commander of the U.N. Forces in Korea as a four-star general, and Dean Rusk was the secretary of state in the Kennedy and Johnson administrations (1961-1969), but they were rather insignificant figures in 1945. (ysfine.com)


길을 찾아서] 통한의 38선, 미국이 긋고 소련이 거들고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0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 조선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해주겠노라고 약속한 그 ‘카이로 선언’이라는 것이 어떠한 절차를 거쳐 발표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1943년 12월 1일, 루스벨트·처칠·장제스(장개석), 세 거두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선언문 서두에는 “조선 인민의 노예적 상태에 유의하여”라는 말이 나와 있소이다. 우리가 차차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선의 독립’이라든가, ‘그들의 노예적 상태’라든가 하는 개념은 오로지 장제스 총통의 주장으로 삽입된 것인데, 그것은 장제스가 충칭을 떠나기 전 김구 선생께서 찾아가 조선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설득공작을 폈던 까닭이었소이다.

기록을 보면, 이 선언문의 최초 문안은 조선을 ‘가급적 조속한 시일 안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독립될 것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루스벨트가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으며, 다시 여기에 처칠이 붓을 가하여 ‘인 듀 코스’(in due course)로 표현을 바꿨다는 것이오이다. 영어의 이 표현은 미묘한 것인데, 우리말로는 ‘적당한 시기에 일정한 절차를 밟아서’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지요.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 처칠은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 국가들이 지배해 온 아시아 식민지역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 ‘서구 국가’에는 암묵적으로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오이다.

여기서 그 38선, 다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는 얘기를 해보겠소이다.

일본이 8월 6일과 9일 연거푸 원자탄 세례를 받아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7월 28일)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막바지 상황에서도, 오로지 국체(國體)의 문제, 즉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神)의 나라’라는 점을 과연 연합국이 인정하겠느냐의 여부를 놓고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었소이다.

그러다 결국 항복 결정을 내린 것은 8월 10일 밤부터 11일 새벽 사이였는데, 그 통보가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에 발신된 시점이나, 미 당국이 그 통보를 받은 때는 확실치 않으나, 부랴부랴 국무차관 매클로이가 국무·육군·해군의 3성 조정위원회 스윙크(SWNCC)를 소집한 것이 워싱턴 시간으로 10일 자정이 가까운 심야였소이다. 그때 매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대령에게 미국 쪽에 가장 유리하게 조선반도를 둘로 가르는 분할선을 설정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오이다.

그 시점에서 소련군은 이미 스티야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이 조선 경내로 들어와 있었는데, 조선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군은 1000㎞나 떨어진 오키나와의 하지 중장 휘하 제24군단뿐이었으니, 미국으로서는 얼마나 다급했겠소이까. 매클로이는 두 대령을 회의실 옆방(펜타곤 4층 868호실)에다 몰아넣고 30분 안에 결정을 내리라고 명령했는데, 하필 그 방 벽에는 소학교 흑판에나 있을 법한 작은 조선지도가 걸려 있었다는 것이외다. 두 사람은 38선을 표시했고, 이 정도라면 소련 쪽도 받아들일 것 같고, 또 남쪽으로 서울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만족하면서, 매클로이는 이를 승인했다는 것이외다.


여기서 특히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38선은 소련과 미국이 의논해서 합의로 정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이고 38선은 미국 단독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오이다.

미국이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에 들어 있는 38선의 조항을 모스크바 주재 군사사절단장 윌리엄 딘을 통해 스탈린에게 알린 것은 8월 15일이었는바, 그가 군소리 없이 동의한 것은, 만일 소련이 38선을 받아들이면 일본 홋카이도의 분할 점령쯤은 미국이 승낙할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김칫국부터 먼저 마신 스탈린의 오산의 결과였다는 바이외다.

나와 더불어 89년 3월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교환한 약속의 말은 “남의 나라가 멋대로 그어놓은 38선, 그게 뭐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고 신주 모시듯 끼고 있는가. 이런 상태가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된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니 이것을 걷어치우고 95년을 통일기원 1년으로 하자”는 것이었소이다. 이 약속의 말은 문 목사가 먼저 제창해 김 주석이 받아들인 것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오이다.
아깝게도 문 목사는 94년 1월 18일, 김 주석은 6개월 뒤인 7월 8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셨지요. 문 목사께서는 나보다 여섯 살이 위이시고, 김 주석과 나는 열두 살 차인데 나만 홀로 남아 있어 그때를 곰곰이 회상하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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